오래된 여행 – 다시 찾은 카불, 아프가니스탄

바미얀을 여행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한 친구를 만났다.

오래전 일이라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소련 침공 이후 가족들과 함께 파키스탄 폐샤와르로 탈출했고, 내전 기간 동안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어쩌면 폐샤와르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영어 교육을 받았고, 서양의 문화를 어느정도 접하면서 자랐다.

그리고 미군의 주둔과 탈리반의 퇴각으로 나라가 안정을 되찾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농경과 가내수공업, 아편 재배, 약간의 유목이 전부였던 사회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바미얀이었다.

내가 여행했던 2005년은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불상을 복구하기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여러 NGO에서 바미얀을 조사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과 독일, 프랑스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는 그의 어학 능력을 활용해 직업을 구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난 잘 되길 기원한다고 얘기했고, 그는카불에 돌아가거든, 자신의 친구들을 찾으라고 했다. 쪽지에 친구 전화 번호를 적어주었다.

정밀 포격이 일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석굴을 감싸던 외벽의 단면에는 상처하나 없이, 석상만 정확하게 파괴되었다. 불교 역사상 가장 훌륭하고, 가장 특이하며, 가장 경이로운 유적 중 하나가 둘무더기가 되어 굴러다닌다. 과연 복구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그 것이 맞는 것인지도 난 잘 모르겠더라. 파괴된 그대로의 역사가 의미를 갖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복구의 주체가 아프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못내 아쉬웠다.

사실 이슬람에서 이야기하는 우상 파괴는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 것이다. 선지자를 신격화하는 과거의 전통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이 온전히 신과 만나기를 바랬던 것 아닐까? 무함마드 역시 자신을 숭배하지 말고, 단지 신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로 여겨줄 것을 당부했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사랑하는 것이지,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믿음이 종교가 되는 순간 말씀은 오도되고, 극단적으로 해석된다.

아프간의 땅은 불모지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불모의 땅이다. 그럼에도 이 곳은 동남쪽으로 인도, 동북쪽으로 중국, 북으로는 중앙 아시아와 러시아, 서로는 페르시아, 그 넘어에는 유럽까지, 세계사를 풍미했던 모든 세력들의 접점이었다. 알렉산더도, 징키스탄도, 무굴 제국도, 아랍 세력도, 재정 러시아도, 영국령 인도도, 소련도, 미국도 이 땅을 갖고 싶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누구에게도 이 땅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 땅을 철처하게 버렸다. 이 땅의 사람들도 버려졌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자들에게 철저하게 파괴되고, 버려졌다. 이 땅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독립적인 정치색을 갖는 것을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카불로 돌아가는 길. 타이어에 문제가 있었고, 차에는 기름이 없었다. 기사는 반대쪽으로 지나는 차를 얻어타고 우리가 지나온 마을로 돌아갔고, 우리는 기다렸다. 자세히 보면 파란색 부르카를 쓴 여인은 벌판을 바라보며 부르카를 젖혀 올렸다. 얼굴을 내놓고, 더운 열기라도 신선한 공기를 마주하고 있다. 절대로 다가서지 말아야하는 순간이다.

집 밖을 나와서 얼굴을 하늘 아래 드러낼 수 있는 시간. 우리는 계속 기다렸다.

다들 기다리는 것에 익숙해 보였다. 누구하나 불평하지 않았고, 화를 내거나, 조급해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것이다. 일행 중 한명이 나에게 도로를 벗어나지 말라고 했다.

난 볼일이 급해 어쩔 수 없다는 시늉을 했지만, 절대 벗어나지 말라고 반복했다. 아직 지뢰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도로에 앉아서 볼일을 보면서 반대로 지나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다지 민망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실제로 이 곳 사람들은 남자들도 앉아서 소변을 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말 앉아서 볼 일을 본다.

담배를 피우시는 노인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선거철이었다. 정확히 어떤 선거인지는 몰랐지만, 대략 총선인 듯 했다. 어디에나 포스터가 붙어있었고, 다행히 로켓탄을 든 사진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10년이 넘는 내전을 지긋지긋하게 여겼고, 그 시간 동안 가족을 잃었고, 탈레반에게 억압을 당했다.

그들은 평화를 원했다.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휴게소에서 만난 트럭 운전수. 나이가 그리 많지 않아 보였는데, 사진으로 보니 주름이 깊다. 아프간의 사람들은 대체로 조용하다. 말이 별로 없고, 자기 할 일을 조용히 한다. 이방인의 모습을 신기해하지만 다짜고짜 다가와서 말을 걸지도 않는다. 혼자 사는 법을 알고 있는 늑대 같은 사람들이다. 결국 반나절을 넘게 달려, 저녁이 되기 전에 카불에 도착했다.

온갖 NGO들이 돈을 뿌려댄 탓에 카불의 몇 안되는 숙소는 늘 만원이었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았다. 바미얀의 숙소가 2~3 $ 이었지만, 카불은 60 ~ 70$ 수준이었다. 너무 비쌌다. 더 큰 문제는 정상적인 숙소를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론리플래닛에 나온 게스트하우스도 대부분 자리를 옮기거나, 터무니 없는 가격을 요구했다.

난 결국 바미얀에서 받은 친구의 연락처로 전화를 했다. “바미얀, 아무개” 라고 짤막하게 얘기했다. 그는 나의 위치를 물었고, 30분이 채 지나기 전에 그는 나를 찾아왔다. 아직 카불에서 외국인을 찾기는 어렵지 않은가 보다.

나를 픽업해주었던 친구다. 역시 파키스탄에서 교육을 받았고, 얼마전 카불로 돌아왔다고 했다. 자신은 하자라의 피가 흐른다고 했다. 하자라는 바미얀 지역에 사는 소수 민족으로 몽골인의 피가 흐른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로 놀랍게도 아시아인에 가깝게 생겼다. ‘연을 쫒는 아이’ 같은 아프간 배경의 소설, 영화를 보면 반드시 이들의 모습이 나온다. 언제나 시종, 하녀 등 하층민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늘 놀림의 대상이 되거나 괴롭힘을 당한다. 그들은 아프간인이면서 동시에 이방인이다. 탈레반 집권 시기에도 하자라들은 바미얀에서 집단적으로 살해당했다. 아리안 / 페르시아 계통의 남부 파슈툰들은 아프간에 하자라가 사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래서 죽였다.

내가 초대받은 곳은 택시 회사가 있는 공터의 작은 건물어었다. 그는 나에게 잠시 기사 대기실에서 놀고 있으라고 했다.  백여명에 가까운 택시 기사들이 낮잠을 자고, TV를 보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의 등장에 놀랐지만,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잠시후 그 친구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따라오라고 했다.

“여긴 좀 위험해. 어서 나가자”

나는 속으로 ‘너를 따라가는게 더 위험한거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대체로 내 또래 젋은이들의 초대는 거절하지 않는 원칙 같은게 있었다. 그냥 믿을 수 있었다.

앞서 보던 아프간 사람들과는 얼굴이 확실히 다르다. 이들은 대략 15명 정도의 난민 캠프 출신의 사람들이었고, 작은 옥탑방을 빌려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역시 여자 사진이 있다.

이 작은 방에 15명이 먹고, 잔다.

해가 지려고 하자, 그들은 나에게 배가 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난 배가 고프다고 했다.  그들은 어디론가 나가더니, 난과 양고기 샤슬릭을 신문지에 싸서 들고 왔다. 나에게 먹으라고 했다.

난 같이 먹자고 했다. 그들은 괜찮다고 했고 극구 먼저 먹으라고 재촉했다.

내가 밥을 먹는 동안 그들은 방에서 나가 건물 옥상에서 웃고 떠들며 놀았다. 난 방에 남겨져 그들이 나에게 대접한 ‘비싼’ 음식을 먹었다. 미안한 마음이 너무나도 컸지만 난 먹었다. 아프간에서 먹은 음식 중에 단연 최고였다.

내가 밥을 다 먹고, 해가 지기 시작하자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씩 방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에게 하자라처럼 말하는 법을 가르쳐줬고, 원래 외국인들에게 말 가르쳐줄 때 흔히 하는 장난처럼, 난 뜻도 모르는 아프간 비속어들을 난발하며, 퇴근하는 친구들을 맞이했다.

다들 이 자식은 뭔가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금새 외국인인 것을 알아차렸다. 그 중 한 명은 능숙한 솜씨로 쌀을 골랐다. 쌀에 아주 약간의 향신료를 섞었고, 방 한켠에 있던 밥솥을 이용해 밥을 했다.

이 친구는 그냥 시종일관 농담으로 일관했다.

이 친구는 오쇼 라즈니쉬를 아냐고 나에게 물었다. 안다고 대답했고, 그와 불교에 대해 얘기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젊은이들과 영어로, 불교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 여행 전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난 하루였다.

그들은 산더미 같은 밥을 신문지 위에 쌓아놓고 모두 둘러앉아 먹었다. 물론 나도 먹어야만 했다. 나에게 대접했던 고기도 없었고, 난도 없었다. 그냥 밥만 있었다. 약간 비릿한 향신료 맛이 났지만, 모두가 둘러앉아 아주 유쾌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나도 손으로 식사하는 것에 어느정도 익숙해져 있었던터라, 어색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에게 여행의 행복과 행운을 빌어주었고, 나 역시 그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의 평화와 번영, 발전을 기원했다. 그리고 좋은 직장을 구해서, 결혼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 날 밤 옥상에서 별을 보면서 잤고, 하루를 더 머문후 이란 비자를 받아, 아프간의 서쪽 도시 헤랏으로 갔다. 그들은 나에게 여행의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그래서 난 아프가니스탄을 사랑한다.

언젠가는 다시 찾아가, 카불 리버를 바라보며,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으면 좋겠다.

한 십년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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